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니자키 준이치로 (문단 편집) === 결혼생활과 스캔들 === 1915년, 29세였던 다니자키는 9살 아래의 이시카와 지요(石川 千代)와 혼인하게 된다. 이듬해인 1916년에는 장녀 아유코(鮎子)가 태어났고, 1918년에는 조선, 만주를 거쳐 중국 각지를 여행하기도 한다. 당시 그의 조선 기행문은 <일본 작가들이 본 근대 조선>[* 이한정 동국대 일본학연구소 연구원과 미즈노 다쓰로 교토조형예술대 강사가 공동으로 엮은 책으로 2009년에 소명출판에서 출간. 다니자키 외에도 [[구니키다 돗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기노시타 모쿠타로]], [[나카지마 아쓰시]] 등 1891년부터 1941년까지 열세 명의 일본 작가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쓴 소설과 수필들이 번역, 수록됐다.]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그러나 결혼 직후 다니자키는 자신의 기준으로 지나치게 정숙하고 순종적이었던 아내 치요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결혼한 이듬해였던 1916년 아내 지요의 여동생이었던 당시 14세의 소녀 세이코(せいこ)[* 예명 하야마 미치코(葉山 三千子)로 1920~1930년대 영화배우로 활동하였다. 다니자키의 소설 『치인의 사랑(痴人の愛)』의 여주인공 나오미의 모델로도 알려져 있으며, 상당히 자유분방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상당히 장수하였는데, 1996년에 만 94세로 사망하였다.]의 양육을 맡게 되면서 점차 세이코에게 빠져들게 된다. 다니자키는 어머니 세키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활달하면서 남성에 대해 지배적인 성격을 가진 여성을 좋아했던 것이다. 다니자키는 점차 세이코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아내인 지요와의 사이는 악화되어 갔다. 그런데 이 때 다니자키의 친우였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사토 하루오(佐藤 春夫)는 다니자키에게 냉대받던 지요에게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곧 사랑으로 발전하면서 [[삼각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아내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했던 다니자키는 사토에게 자신의 아내를 양도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이것을 문단의 동료들과 여러 인사들에게 연하장으로 널리 알린다. 그러나 막판에 결심을 바꾸어 이 약속의 이행을 거절하는데, 격분한 사토는 다니자키와 절교하게 된다. 이것이 '오다와라 사건(小田原事件)'[* 당시 다니자키가 오다와라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이라 하여 일본 문단 내의 가장 큰 스캔들 중 하나이다.[* [[식민지]] [[조선]]의 문학 잡지에까지 실렸을 정도의 센세이션이었다.~~사실 지금 봐도 엄청난 일이긴 하다~~ [[원산]]의 한 여학교에서는 아예 문학 교과서에 실려 있던 다니자키가 쓴 기행문을 빼버리기까지 했다나.] 실연당한 사토는 꽁치의 노래(秋刀魚の歌)라는 자신의 작품에서 치요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둘은 1926년 화해하게 되고, 1930년 다니자키가 지요와 이혼한 뒤 사토는 지요와 재혼하면서 이 약속은 이행되게 된다.[* 사토와 재혼하기 전에 지요는 역시 다니자키와 아는 사이인 오쓰보 스나오(大坪 砂男)라는 남자와 밀통했다. 그리고 그와의 사이에 생긴 아이를 다니자키의 강요로 낙태했다는 추측이 있다.][* 참고로 본명은 와다 로쿠로(和田 六郎)인 오쓰보 스나오는 [[에도가와 란포]]가 일본 전후파 5대 추리소설가 중 하나로 꼽은 단편 작가이며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 와다 슈(和田 周)의 아들, 즉 그의 손자가 바로 그 유명한 [[우로부치 겐]]이다!!]사토와 치요 사이에 태어난 아들 마사야(方哉)의 이름은 다니자키가 지어주었다. 또한 사토의 조카인 동양사학자 다케다 류지(竹田龍児)와 다니자키의 딸 아유코가 결혼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